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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

우아한 화학

‘일상을 바꾼 화학’을 주제로 읽기 좋고 이해하기 쉬운 지식 정보를 제공합니다. 인간 삶을 한차원 높은 수준으로 개선한 화학사를 포함합니다.

학문으로서 과학에 대한 오랜 편견은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대부분 어려운 텍스트로 ‘방구석 1열’의 관심사와는 요원한 취급을 받지요. 여기에도 재기발랄하고 흥미로운 ‘썰’들이 존재합니다. 가설 증명을 위해 100년 가까이 여전히 실험 중인 피치(Pitch)처럼 말입니다.

‘썰’푸는 아스팔트 실험실
과학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일들은 예상 외로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다. 가설 입증을 위해 100년 가까이 거듭하고 있는 피치 낙하 실험이 대표적이다.
<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clipartkorea.co.kr) >

고체와 액체의 싸움

잠시 기초과학 시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썰을 풀기 전에 준비가 필요하니까요. 고체ㆍ액체ㆍ기체의 차이부터 시작할까요?

고체는 물질을 이루는 분자들 사이가 아주 가깝고 서로 강하게 끌어당깁니다. 분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어 항상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죠. 그 딱딱함 때문에 손으로 쉽게 잡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액체는 분자들 사이가 매우 느슨합니다. 당기는 힘도 고체보다 약하고요. 흐르는 성질 때문에 담는 용기에 따라 시시각각 모양이 변하기도 하죠.

기체는 분자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어 서로 당기는 힘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사방으로 퍼져 나갑니다. 액체는 담는 용기에 따라 모양이 변해도 부피가 그대로지만 기체는 모양에 따라 부피에 차이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손에 잡히지도 않고요.

‘썰’푸는 아스팔트 실험실
피치는 원유나 식물에서 추출한 점탄성을 가진 고형 중합체를 말한다. 아스팔트의 원료가 되는 물질로 모습과 성질은 고체의 성격을 띈다.
<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clipartkorea.co.kr) >

기체는 몰라도 고체와 액체의 차이는 쉽습니다. 무엇이 액체고 고체인지 눈으로도 가늠되니까요. 하지만 세상에 모든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론이 길었지만 핵심은 피치(Pitch)입니다. 피치는 원유나 식물에서 추출한 점탄성을 가진 고형 중합체를 말하는데요. 길을 포장할 때 사용하는 아스팔트의 원료가 되는 물질입니다. 원유에서 추출되는 피치는 누가 보더라도 고체 형태입니다. 실제 망치로 치면 덩어리가 깨지는 등 고체 성격을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호주 퀸즐랜드 대학교의 토머스 파넬(Thomas Parnell) 박사는 피치가 액체일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파넬 박사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피치가 액체임을 증명하기 위한 길고도 험난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긴 실험

피치 낙하 실험(Pitch drop experiment)은 상온에서 거의 고체처럼 보이는 피치가 실제로 점도 높은 액체임을 보여주기 위해 중력으로 방울 맺혀 떨어지게 하는 실험입니다.

파넬 박사는 피치가 액체라는 가설을 증명하고자 이 간단한 실험을 추진합니다. 그는 피치를 깔때기 모양의 유리병에 담고 아랫부분에 구멍을 냈습니다. 액체라면 분명 밑으로 흘러내릴 테니까요. 그런데 말이 쉽지 피치를 하나의 덩어리로 안정화시키는 데 무려 3년이 걸렸습니다.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고난이었던 셈이죠.

‘썰’푸는 아스팔트 실험실
퀸즐랜드 대학교의 피치 낙하 실험 장비.
< 출처: 위키피디아 (ko.wikipedia.org) >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놀랍게도 고체로 보이던 피치가 흘러내렸습니다. 다만 첫 번째 방울이 흘러내리기까지 첫 실험 이후 8년 넘게 걸렸습니다. 이때가 1938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방울이 흐르기 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합니다. 세상이 천지개벽하는 동안 단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죠.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총 아홉 방울이 흘러내렸습니다. 마지막 기록은 2014년 4월 24일입니다.

슬프게도 방울이 흘러내리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연구자는 없습니다. 모두 관리자가 부재 중일 때 흘러내렸죠. 여덟 번째 방울 때는 웹캠을 설치했으나 기계 오작동으로 촬영에 실패했습니다. ‘밀당의 고수’라는 농담도 여기서 나왔죠.

‘썰’푸는 아스팔트 실험실
피치 낙하 실험을 기록한 영상. 2014년 아홉 번째 방울이 떨어진 이후 무소식이다.
< 영상출처: UQ Science >

UQ Science

심지어 15분 차이로 목격에 실패한 경우도 있습니다. 1988년 일곱 번째 방울이 떨어질 때는 떨어질 걸 예감한 존 메인스톤(John Mainstone) 교수가 종일 대기했으나 잠시 커피를 뽑으러 간 사이 흘러내렸다고 합니다. 참고로 존 메인스톤 교수는 1961년부터 52년간 퀸즐랜드 대학에서 실험을 주도적으로 관리한 인물입니다. 가히 피치와 함께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피치가 흘러내리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퀸즐랜드가 아닌 아일랜드 트리니티 대학교(Trinity College Dublin)에서 촬영됐습니다. 영상을 얼마나 빨리 돌렸는지 시계 돌아가는 속도를 보면 알 수 있죠. 트리니티 대학에서도 1944년부터 피치 낙하 실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27년 처음 시작된 피치 낙하 실험은 담당 교수를 바꿔가며 2021년인 지금까지 계속 진행 중입니다. 한 세기 가까운 94년째 실험을 지속하는 셈입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기네스북에 가장 오랫동안 수행 중인 과학 실험으로 등록되기도 했지요. 이 또한 결실이라면 결실일 수 있겠네요.

세상 바꾸는 끈기와 집념

피치처럼 상태가 확실하지 않은 물질이 또 있습니다. 바로 유리입니다. 유리를 당연히 고체라고 생각하지만 과학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자 구조를 확대하면 액체에 가깝거든요. 이런 물질들을 비정질 고체(Noncrystalline solid)라고 하는데요. 원자들의 위치에 장거리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유리도 피치처럼 흘러내릴까요? 오늘날 잘 가공된 유리는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조금씩 밑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오래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좋은 사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래로 퍼진 창가의 유리가 묵직하고 두꺼워진 경우죠.

‘썰’푸는 아스팔트 실험실
흔히 고체라고 생각하는 유리도 아래로 흘러내리는 액체의 성질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물질 구조를 일반화하기 어려운 이유다.
<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clipartkorea.co.kr) >

피치는 이제 당당히 액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피치의 점도는 물의 2천300억(2.3×1011)배, 꿀의 200만(2×10⁶)배라고 합니다. 상상은 잘 되지 않지만 아주 묵직하고 느리게 유동할 액체인 것은 맞지요.

사실 피치가 고체인지 액체인지는 여전히 헷갈립니다. 한여름 꿀렁거리는 듯한 아스팔트 위에서도 갸우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실험으로야 액체라지만 일상에서는 보고 또 봐도 고체니까요. 그래도 과학자들의 집착과 끈기로 새로운 이론이 수립되긴 했습니다. 94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말이죠.

기술 발전은 거창한 이론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닐 겁니다. 작은 발견과 호기심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지요. 그 시절엔 아니었지만 지금은 맞는 피치 실험처럼 앞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할 다양한 발견이 거듭되길 기대해 봅니다. 물론 94년보다 빨리 그날이 온다면 더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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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후
베스트셀링 도서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를 비롯해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주인공은 선을 넘는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까지 총 4권의 책을 집필하고 더 많은 일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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